한국 다례 종가 ‘명원’
日 “한국엔 다도 없나?”
명원 김미희 여사 발원
전국 다니며 고증·복원
조선왕실 궁중다례 전승
한국 차문화 보급 나서
1995년 명원문화재단 창립
새계차박람회 열며 홍보
차 접목한 청소년 교육도
“명원 의미가 공생의 삶”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부모님을 떠올리면 항상 아련한 이유는 바로 생전에 못다한 효도 때문일 것이다. 특히 자식 뒷바라지에 평생을 쏟는 어머니란 존재는 더 가슴에 애달프게 와 닿는다.
우리나라에 ‘다례’ 개념을 최초로 정립한 명원 김미희 여사. 그녀에게 몸이 약한 어린 딸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집 바깥으로도 나가기 힘들어 어머니의 곁에서 다례를 배우기 시작한 딸은 어머니가 남긴 차(茶)에 대한 사랑을 조용히 잇고 있다. 그녀에게 다례는 바로 어머니에 대한 효도였다. 바로 김의정 명원문화재단 이사장(76)의 이야기다.
명원 김미희 여사의 차 사랑
명원 김미희 여사를 아는 이들은 김의정 이사장이 어머니와 닮았다고 말한다. 특히 차에 대한 열정이 그렇다. 김 이사장은 어머니 김미희 여사에 이어 2대째 우리 고유의 차 문화를 전승 중이다.
무형문화재 궁중다례의식 보유자인 김 이사장의 하루는 차로부터 시작되고 차로 끝난다. 매순간 차를 대하는 자세는 진지하다. 옷매무새를 정갈하게 다듬고 자세를 갖춰 귀한 손님처럼 차를 맞이한다. 현재 김 이사장은 철저한 역사고증을 바탕으로 일본식 차문화를 배제한 우리 고유의 차문화를 보급하고 있다. 명원문화재단이 ‘한국 다례 종가’로 명성을 얻고 있는 이유다.
그 시작은 김 이사장의 어머니 명원 김미희 여사부터 시작됐다. 명원문화재단의 ‘명원’ 이름 역시 어머니의 호에서 따왔다.
“어머님께서 1952년 헬싱키올림픽 선수단을 후원한 아버님을 따라 유럽에 가셨어요. 당시 덴마크 왕실 초청 오찬 등에서 차문화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셨습니다. 마지막에 들른 일본에서 깊은 인상을 받으셨지요. 일본에서는 차가 생활화 되어 있고, 정치, 사업 등 중요한 사안이 모두 다회에서 논의되거든요. 어머님이 다회에 참석했는데, ‘한국에도 이런 차문화가 있느냐’는 한 일본인의 질문에 문제의식이 생기셨어요.”
일본은 조선 도공이 만든 막사발을 국보 1호로 지정해 애지중지하고 있었지만 정작 한국은 차문화에 관심이 없던 상황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먹고살기 바빠 차문화가 발달하기 힘들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일본보다 오랜 차 역사를 가지고 있지요. 일본에서의 그 일이 어머니에게 큰 자극이 됐고, 어머니는 귀국 직후 남도 차밭부터 찾아다니며 본격적으로 전통 다례 복원을 시작하셨죠. 전국 방방곡곡으로 우리 다례법을 찾아 다녔지만 다인으로 이름을 알린 스님들조차 일본식 다례법을 따르는 상황이었어요.”
명원 김미희 여사는 이런 와중 궁중다례를 복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954년 9월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 황후가 성북구 정릉의 인수재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왕실 복원을 거부한 상황에서 명원 김미희 여사는 이들을 몰래 도왔고 황후를 모신 김명길 상궁에게서 왕실 다례를 전수받게 됐다.
“곁에서 지켜본 어머니의 모습은 참 외로웠습니다. 아무도 차를 알아주지 않았고, 차에 관한 어떤 것도 정립돼 있지 않았던 상황에서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도공을 찾고, 수십 개의 가마를 만들고, 특히 한국식 다기 제조에 무척 애를 많이 쓰셨어요. 사재를 털어 다기 제작에서 학자들의 차 연구, 각종 세미나 등에 이르기까지 한국 다도 복원에 관한 모든 것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어요.”
1975년 남편 성곡 김성곤 거사 입적 후 김미희 여사의 행보는 대흥사 일지암 복원까지 미쳤다. 1976년 시작된 일지암 복원은 초의선사를 통해 한국차의 근원을 바로 세우는 불사였다. 김미희 여사는 공사비 지원은 물론 수시로 해남에 내려가 일지암 설계 원형을 제공하고 꼼꼼히 불사를 챙겼다. 하지만 1980년 일지암 낙성식 봉행 이듬해, 김미희 여사는 61세의 나이로 세연을 다하게 된다.
김 이사장은 모친의 유지를 계승해 대흥사에 초의 스님 동다송비를 세우고, 국민대에 제2 일지암을, 순천만 정원박람회 안에 제3 일지암을 복원시켰다.
2010년 일본서 궁중다례를 시연하는 김의정 이사장.
어머니 원력, 그대로 이어져
김 이사장은 자연스럽게 어머니 곁에서 차를 접하고 배웠다. 생전 어머니 김미희 여사는 김 이사장이 당신의 뜻을 이어받았으면 했다. 고생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터라 강권하지는 못했지만 김 이사장이 어머니의 뜻을 알고 그 길을 자처하게 됐다. 김 이사장이 명원문화재단을 이끌며 전통다례의 맥을 잇고 차 문화 발전에 힘쓰는 이유다.
하지만 김의정 이사장은 아버지 성곡 김성곤 거사가 창업한 쌍용그룹 일가란 배경으로 저평가돼 온 측면이 적지 않다.
“어머니가 전통다례를 복원할 때도 먹고살기 힘든데 무슨 예절이 필요하냐며 비난을 하던 이들이 있었어요. 나중에는 돈이 있어 한 것이라고 말들이 많았지요. 문화는 돈이 없으면 안 되지만 돈 만으로도 안되는 겁니다. 현재 지속적으로 차문화 보급에 앞장서온 이유도 어머니의 우리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정신을 잇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김 이사장이 어머니에게서 이어받은 것은 차에 대한 사랑 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불심도 함께 이어받았다. 명원 김미희 여사는 불심이 돈독했다. 김 이사장의 어린 시절 집은 찾아오는 이는 누구든 따뜻하게 맞아주는 자비도량이었다. 정관계의 내로라는 이들부터 굶주린 이들까지 다양한 이들이 각자의 사연을 갖고 찾아왔다.
명원 김미희 여사는 이들에게 조용히 자비보시를 베풀었다. 배고픈 아이들에게 밥을 내주고, 학비가 없는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불교계가 내홍으로 힘들었던 1955년 전국신도회 재정 지원을 하는 등 물심양면 불교 재건에 힘썼으며, 여성재가불자모임 마야부인회, 정재계 불자 여성 모임 관음클럽을 창립해 대사회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김 이사장은 2005년부터 7년간 여성 최초로 중앙신도회장을 지내며 신도회관 건립과 조선왕실의궤 환수 등 굵직한 일을 맡아 나서게 된 것도 어머니의 원력을 그대로 이어 받았기 때문이다.
“여성으로서 중앙신도회장이 된 것도 사실 어머니 덕분이지요. 그래서 신도들의 숙원이었던 회관 건립을 임기 내 목표로 냈어요. 내고 나서 사실 걱정은 됐지만, 부처님 가피로 무사히 건립하게 됐습니다.”
어머니에게 배운 다례와 궁중의 예절은 김 이사장이 일본에서 조선왕실의궤 환수운동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됐다. 중앙신도회장이던 2006년 조선왕실의궤 환수위 공동대표로 조선왕실의궤 환수 입장을 밝혔을 때 주변에선 불가능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일본 국회의원들이 궁내청이 소장한 문화재에 대한 언급 자체를 꺼렸다. 하지만 혜문 스님을 비롯한 문화재 전문가들의 활동에 김 이사장의 지원이 더해지며 반환운동은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다.
당시 김 이사장은 사재를 털어 직접 차로 인연을 맺은 일본 차인들과 국회의원을 찾아다니며 설득했고, 선물 하나를 준비하는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다구를 싸는 보자기만 하더라도 일본에서 만들 수 없는 한국 만의 독특한 보자기가 있어요. 이처럼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정성이 들어간 선물을 전달하며 우리의 안목, 정성을 전했습니다. 여기에는 다례를 하며 쌓인 안목이 큰 도움이 됐지요.”
2016명원세계차박람회에 참석한 외국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김의정 이사장. 명원세계차박람회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각국에서 참여하는 한국대표 차박람회다
여성 최초 조계종 중앙신도회장
신도회관 발원·화주 나서
조선왕실의궤 환수도 기여
日차인 만나 직접 설득
사재 아끼지 않는 보살행
차문화 세계에 알릴 2017명원세계차박람회
명원문화재단이 올해로 22년째 개최하고 있는 명원세계차박람회는 우리 차문화의 자부심을 알리는 대외적인 행사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을 되살리는 기회다. 1995년 재단 설립 이후 차 문화를 알리기 위해 호텔에서 열던 행사가 이제는 코엑스에서 수만 명이 참여하는 박람회로 규모가 커졌다.
이 또한 명원 김미희 여사의 발자취를 따라서이다. 김미희 여사는 궁중다례를 기초로 생활다례를 정립하고 다기의 현대화에도 앞장섰다. 차와 다구, 복식과 다실건축, 조경 등 종합적인 차문화 발전을 견인했고, 한국 최초로 차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또 중국과 일본과는 다른 한국의 차시연회도 열었다.
김 이사장은 “한국 다례 복원은 단순히 예절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인 연구도 함께 해 나가는 것”이라며 “중국과 일본 차문화는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우리에게는 차 문화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를 체계화해 세계에 알려나가는 것이 목적”이라고 박람회 개최 배경을 설명했다.
8월 24일부터 27일까지 ‘차와 인성교육’을 주제로 코엑스에서 열리는 2017명원세계차박람회에는 세계다례 시연을 비롯해 명차품평대회 등도 열린다. 특히 세계 인성교육 전문가들이 강연을 진행해 눈길을 끈다.
김 이사장은 일본 식민지 시절 우리의 문화가 말살되면서 사라져 버린 다례를 지속적으로 알리겠다고 말했다.
“차는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일상에서 즐겨온 전통입니다. 우리가 제사를 모시는데 차례라고 하지 않습니까. 차례는 차와 예절이라는 뜻입니다. 조상에게 차를 올리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이 차 같은 고급문화는 조선사람에게 맞지 않다면서 말살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차례가 아닌 주례(酒禮)가 돼 버렸습니다.”
차문화 발전을 위해 ‘차산업 발전 및 차문화 진흥에 관한 법률’ 제정을 위한 100만 서명운동 범국민추진위원회 회장을 맡아 전국을 뛰어다니며 차문화진흥법의 국회 통과를 이끌기도 했다.
현재 김 이사장은 다례를 기본으로 한 청소년 인성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명원 세계 차 박람회와 함께 개최하고 있는 ‘국제청소년 차 문화대전’은 국내 유일의 대통령상이 주어지는 차 관련 행사다.
“건강 유지와 정신을 맑게 하는 차를 청소년 시절부터 접하고 다례를 통해 예절을 배운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인성교육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 열고 있습니다.”
인성교육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인성교육진흥법 도입에도 기여한 김 이사장은 “차에는 두손으로 차를 올리는 공경심, 배려심, 정성 등이 담겨 있다”며 “인성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 차를 통한 예절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이사장은 “아이들의 정서와 건강 인성교육에 다례(茶禮)만한 것이 없다. 서양에서는 차는 늘 식사와 함께 한다. 이는 단순한 식음이 아닌 매너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한국사람들이 속정이 깊지만 거칠고 무례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국제적인 매너가 부족해서 일때가 많다. 처음에는 어렵고 어색할지 모르지만 어려서부터 이를 익혀나간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차에 대한 철학을 묻자 김 이사장은 어머니의 호이자 재단의 이름인 ‘명원(茗園)으로 대신 답했다.
“〈다경〉(茶經)에는 1년에 세 번의 찻잎을 채취할 수 있는데 초여름 맨 처음 싹이 나올 때를 가(嘉)라 하고 이어 설(設), 그 다음을 명(茗)이라고 합니다. 명은 첫 번째가 아닌 세 번째입니다. ‘나는 항상 부족합니다. 평생을 정진하겠다’는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원(園)은 자연입니다. 명원이란 말 속에는 자연에 대한 하심, 그리고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이란 뜻이 있습니다.”
김의정 이사장은…1941년 쌍용그룹 창업주인 故김성곤 회장(1913~1975)과 명원 김미희 여사(1920 ~81)의 차녀로 대구에서 출생했다.어머니의 유지를 이어 1995년 명원문화재단을 설립하고 명원차문화대상도 시행하는 등 차문화 대중화와 세계화에 기여하고 있다. 2001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27호 궁중다례의식 보유자로 지정됐다. 2005년에는 조계종 사상 첫 여성 중앙신도회장을 맡았으며, 2009년 재임해 2임기를 지냈으며, 현재 조계사 신도회장을 맡고 있다. 이밖에 사단법인 자생회 이사, 국민대 이사, 예술의전당 이사, 궁중복식연구원 이사, 한일 여성친선협의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노덕현 기자 noduc@hyunbul.com
<저작권자 © 현대불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국 다례 종가 ‘명원’
日 “한국엔 다도 없나?”
명원 김미희 여사 발원
전국 다니며 고증·복원
조선왕실 궁중다례 전승
한국 차문화 보급 나서
1995년 명원문화재단 창립
새계차박람회 열며 홍보
차 접목한 청소년 교육도
“명원 의미가 공생의 삶”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부모님을 떠올리면 항상 아련한 이유는 바로 생전에 못다한 효도 때문일 것이다. 특히 자식 뒷바라지에 평생을 쏟는 어머니란 존재는 더 가슴에 애달프게 와 닿는다.
우리나라에 ‘다례’ 개념을 최초로 정립한 명원 김미희 여사. 그녀에게 몸이 약한 어린 딸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집 바깥으로도 나가기 힘들어 어머니의 곁에서 다례를 배우기 시작한 딸은 어머니가 남긴 차(茶)에 대한 사랑을 조용히 잇고 있다. 그녀에게 다례는 바로 어머니에 대한 효도였다. 바로 김의정 명원문화재단 이사장(76)의 이야기다.
명원 김미희 여사의 차 사랑
명원 김미희 여사를 아는 이들은 김의정 이사장이 어머니와 닮았다고 말한다. 특히 차에 대한 열정이 그렇다. 김 이사장은 어머니 김미희 여사에 이어 2대째 우리 고유의 차 문화를 전승 중이다.
무형문화재 궁중다례의식 보유자인 김 이사장의 하루는 차로부터 시작되고 차로 끝난다. 매순간 차를 대하는 자세는 진지하다. 옷매무새를 정갈하게 다듬고 자세를 갖춰 귀한 손님처럼 차를 맞이한다. 현재 김 이사장은 철저한 역사고증을 바탕으로 일본식 차문화를 배제한 우리 고유의 차문화를 보급하고 있다. 명원문화재단이 ‘한국 다례 종가’로 명성을 얻고 있는 이유다.
그 시작은 김 이사장의 어머니 명원 김미희 여사부터 시작됐다. 명원문화재단의 ‘명원’ 이름 역시 어머니의 호에서 따왔다.
“어머님께서 1952년 헬싱키올림픽 선수단을 후원한 아버님을 따라 유럽에 가셨어요. 당시 덴마크 왕실 초청 오찬 등에서 차문화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셨습니다. 마지막에 들른 일본에서 깊은 인상을 받으셨지요. 일본에서는 차가 생활화 되어 있고, 정치, 사업 등 중요한 사안이 모두 다회에서 논의되거든요. 어머님이 다회에 참석했는데, ‘한국에도 이런 차문화가 있느냐’는 한 일본인의 질문에 문제의식이 생기셨어요.”
일본은 조선 도공이 만든 막사발을 국보 1호로 지정해 애지중지하고 있었지만 정작 한국은 차문화에 관심이 없던 상황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먹고살기 바빠 차문화가 발달하기 힘들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일본보다 오랜 차 역사를 가지고 있지요. 일본에서의 그 일이 어머니에게 큰 자극이 됐고, 어머니는 귀국 직후 남도 차밭부터 찾아다니며 본격적으로 전통 다례 복원을 시작하셨죠. 전국 방방곡곡으로 우리 다례법을 찾아 다녔지만 다인으로 이름을 알린 스님들조차 일본식 다례법을 따르는 상황이었어요.”
명원 김미희 여사는 이런 와중 궁중다례를 복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954년 9월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 황후가 성북구 정릉의 인수재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왕실 복원을 거부한 상황에서 명원 김미희 여사는 이들을 몰래 도왔고 황후를 모신 김명길 상궁에게서 왕실 다례를 전수받게 됐다.
“곁에서 지켜본 어머니의 모습은 참 외로웠습니다. 아무도 차를 알아주지 않았고, 차에 관한 어떤 것도 정립돼 있지 않았던 상황에서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도공을 찾고, 수십 개의 가마를 만들고, 특히 한국식 다기 제조에 무척 애를 많이 쓰셨어요. 사재를 털어 다기 제작에서 학자들의 차 연구, 각종 세미나 등에 이르기까지 한국 다도 복원에 관한 모든 것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어요.”
1975년 남편 성곡 김성곤 거사 입적 후 김미희 여사의 행보는 대흥사 일지암 복원까지 미쳤다. 1976년 시작된 일지암 복원은 초의선사를 통해 한국차의 근원을 바로 세우는 불사였다. 김미희 여사는 공사비 지원은 물론 수시로 해남에 내려가 일지암 설계 원형을 제공하고 꼼꼼히 불사를 챙겼다. 하지만 1980년 일지암 낙성식 봉행 이듬해, 김미희 여사는 61세의 나이로 세연을 다하게 된다.
김 이사장은 모친의 유지를 계승해 대흥사에 초의 스님 동다송비를 세우고, 국민대에 제2 일지암을, 순천만 정원박람회 안에 제3 일지암을 복원시켰다.
2010년 일본서 궁중다례를 시연하는 김의정 이사장.
어머니 원력, 그대로 이어져
김 이사장은 자연스럽게 어머니 곁에서 차를 접하고 배웠다. 생전 어머니 김미희 여사는 김 이사장이 당신의 뜻을 이어받았으면 했다. 고생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터라 강권하지는 못했지만 김 이사장이 어머니의 뜻을 알고 그 길을 자처하게 됐다. 김 이사장이 명원문화재단을 이끌며 전통다례의 맥을 잇고 차 문화 발전에 힘쓰는 이유다.
하지만 김의정 이사장은 아버지 성곡 김성곤 거사가 창업한 쌍용그룹 일가란 배경으로 저평가돼 온 측면이 적지 않다.
“어머니가 전통다례를 복원할 때도 먹고살기 힘든데 무슨 예절이 필요하냐며 비난을 하던 이들이 있었어요. 나중에는 돈이 있어 한 것이라고 말들이 많았지요. 문화는 돈이 없으면 안 되지만 돈 만으로도 안되는 겁니다. 현재 지속적으로 차문화 보급에 앞장서온 이유도 어머니의 우리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정신을 잇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김 이사장이 어머니에게서 이어받은 것은 차에 대한 사랑 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불심도 함께 이어받았다. 명원 김미희 여사는 불심이 돈독했다. 김 이사장의 어린 시절 집은 찾아오는 이는 누구든 따뜻하게 맞아주는 자비도량이었다. 정관계의 내로라는 이들부터 굶주린 이들까지 다양한 이들이 각자의 사연을 갖고 찾아왔다.
명원 김미희 여사는 이들에게 조용히 자비보시를 베풀었다. 배고픈 아이들에게 밥을 내주고, 학비가 없는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불교계가 내홍으로 힘들었던 1955년 전국신도회 재정 지원을 하는 등 물심양면 불교 재건에 힘썼으며, 여성재가불자모임 마야부인회, 정재계 불자 여성 모임 관음클럽을 창립해 대사회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김 이사장은 2005년부터 7년간 여성 최초로 중앙신도회장을 지내며 신도회관 건립과 조선왕실의궤 환수 등 굵직한 일을 맡아 나서게 된 것도 어머니의 원력을 그대로 이어 받았기 때문이다.
“여성으로서 중앙신도회장이 된 것도 사실 어머니 덕분이지요. 그래서 신도들의 숙원이었던 회관 건립을 임기 내 목표로 냈어요. 내고 나서 사실 걱정은 됐지만, 부처님 가피로 무사히 건립하게 됐습니다.”
어머니에게 배운 다례와 궁중의 예절은 김 이사장이 일본에서 조선왕실의궤 환수운동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됐다. 중앙신도회장이던 2006년 조선왕실의궤 환수위 공동대표로 조선왕실의궤 환수 입장을 밝혔을 때 주변에선 불가능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일본 국회의원들이 궁내청이 소장한 문화재에 대한 언급 자체를 꺼렸다. 하지만 혜문 스님을 비롯한 문화재 전문가들의 활동에 김 이사장의 지원이 더해지며 반환운동은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다.
당시 김 이사장은 사재를 털어 직접 차로 인연을 맺은 일본 차인들과 국회의원을 찾아다니며 설득했고, 선물 하나를 준비하는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다구를 싸는 보자기만 하더라도 일본에서 만들 수 없는 한국 만의 독특한 보자기가 있어요. 이처럼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정성이 들어간 선물을 전달하며 우리의 안목, 정성을 전했습니다. 여기에는 다례를 하며 쌓인 안목이 큰 도움이 됐지요.”
2016명원세계차박람회에 참석한 외국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김의정 이사장. 명원세계차박람회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각국에서 참여하는 한국대표 차박람회다
여성 최초 조계종 중앙신도회장
신도회관 발원·화주 나서
조선왕실의궤 환수도 기여
日차인 만나 직접 설득
사재 아끼지 않는 보살행
차문화 세계에 알릴 2017명원세계차박람회
명원문화재단이 올해로 22년째 개최하고 있는 명원세계차박람회는 우리 차문화의 자부심을 알리는 대외적인 행사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을 되살리는 기회다. 1995년 재단 설립 이후 차 문화를 알리기 위해 호텔에서 열던 행사가 이제는 코엑스에서 수만 명이 참여하는 박람회로 규모가 커졌다.
이 또한 명원 김미희 여사의 발자취를 따라서이다. 김미희 여사는 궁중다례를 기초로 생활다례를 정립하고 다기의 현대화에도 앞장섰다. 차와 다구, 복식과 다실건축, 조경 등 종합적인 차문화 발전을 견인했고, 한국 최초로 차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또 중국과 일본과는 다른 한국의 차시연회도 열었다.
김 이사장은 “한국 다례 복원은 단순히 예절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인 연구도 함께 해 나가는 것”이라며 “중국과 일본 차문화는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우리에게는 차 문화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를 체계화해 세계에 알려나가는 것이 목적”이라고 박람회 개최 배경을 설명했다.
8월 24일부터 27일까지 ‘차와 인성교육’을 주제로 코엑스에서 열리는 2017명원세계차박람회에는 세계다례 시연을 비롯해 명차품평대회 등도 열린다. 특히 세계 인성교육 전문가들이 강연을 진행해 눈길을 끈다.
김 이사장은 일본 식민지 시절 우리의 문화가 말살되면서 사라져 버린 다례를 지속적으로 알리겠다고 말했다.
“차는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일상에서 즐겨온 전통입니다. 우리가 제사를 모시는데 차례라고 하지 않습니까. 차례는 차와 예절이라는 뜻입니다. 조상에게 차를 올리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이 차 같은 고급문화는 조선사람에게 맞지 않다면서 말살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차례가 아닌 주례(酒禮)가 돼 버렸습니다.”
차문화 발전을 위해 ‘차산업 발전 및 차문화 진흥에 관한 법률’ 제정을 위한 100만 서명운동 범국민추진위원회 회장을 맡아 전국을 뛰어다니며 차문화진흥법의 국회 통과를 이끌기도 했다.
현재 김 이사장은 다례를 기본으로 한 청소년 인성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명원 세계 차 박람회와 함께 개최하고 있는 ‘국제청소년 차 문화대전’은 국내 유일의 대통령상이 주어지는 차 관련 행사다.
“건강 유지와 정신을 맑게 하는 차를 청소년 시절부터 접하고 다례를 통해 예절을 배운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인성교육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 열고 있습니다.”
인성교육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인성교육진흥법 도입에도 기여한 김 이사장은 “차에는 두손으로 차를 올리는 공경심, 배려심, 정성 등이 담겨 있다”며 “인성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 차를 통한 예절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이사장은 “아이들의 정서와 건강 인성교육에 다례(茶禮)만한 것이 없다. 서양에서는 차는 늘 식사와 함께 한다. 이는 단순한 식음이 아닌 매너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한국사람들이 속정이 깊지만 거칠고 무례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국제적인 매너가 부족해서 일때가 많다. 처음에는 어렵고 어색할지 모르지만 어려서부터 이를 익혀나간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차에 대한 철학을 묻자 김 이사장은 어머니의 호이자 재단의 이름인 ‘명원(茗園)으로 대신 답했다.
“〈다경〉(茶經)에는 1년에 세 번의 찻잎을 채취할 수 있는데 초여름 맨 처음 싹이 나올 때를 가(嘉)라 하고 이어 설(設), 그 다음을 명(茗)이라고 합니다. 명은 첫 번째가 아닌 세 번째입니다. ‘나는 항상 부족합니다. 평생을 정진하겠다’는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원(園)은 자연입니다. 명원이란 말 속에는 자연에 대한 하심, 그리고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이란 뜻이 있습니다.”
김의정 이사장은…1941년 쌍용그룹 창업주인 故김성곤 회장(1913~1975)과 명원 김미희 여사(1920 ~81)의 차녀로 대구에서 출생했다.어머니의 유지를 이어 1995년 명원문화재단을 설립하고 명원차문화대상도 시행하는 등 차문화 대중화와 세계화에 기여하고 있다. 2001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27호 궁중다례의식 보유자로 지정됐다. 2005년에는 조계종 사상 첫 여성 중앙신도회장을 맡았으며, 2009년 재임해 2임기를 지냈으며, 현재 조계사 신도회장을 맡고 있다. 이밖에 사단법인 자생회 이사, 국민대 이사, 예술의전당 이사, 궁중복식연구원 이사, 한일 여성친선협의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노덕현 기자 noduc@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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