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궤 반환 공신은 어머니께 배운 ‘차의 정신’ 일본인 마음 돌리는데 도움'
지난해 해외반출문화재 환수사업과 명원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차문화 대중화를 이끄는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훈장 옥관장을 받은 김의정 중앙신도회장을 성북동 명원문화재단 전수관에서 만났다.
신재호 기자/2012.2.11/불교신문
명원 김미희 여사 슬하서
궁중다례 궁중복식 수학
일본 국회의원 찾아다니며
조선왕조도서 귀환 ‘설득’
올해 교구신도회 연수 주관
여수 세계불교도대회 주력
지난해 12월 일본 궁내청에 보관돼 있던 조선왕실의궤를 비롯한 조선왕조도서 1200권이 100 여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특별한 ‘귀환’의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공동대표인 김의정 조계종 중앙신도회장이다. 그는 지난해 해외반출문화재 환수사업과 명원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차문화 대중화를 이끄는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훈장 옥관장을 받았다. 해외반출문화재 반환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김의정 중앙신도회장을 만나기 위해 지난 1월27일 성북동 명원문화재단 다례전수관을 찾아갔다.
김의정 회장은 고인이 된 어머니 명원 김미희 여사의 대를 이어 문화훈장을 수훈해 더 없이 영광스러워했다. “어머니가 생전에 열정을 갖고 가르쳐준 ‘차의 정신’ 덕분에 문화재도 되찾아올 수 있었고, 옥관훈장도 받게 됐다”며 어머니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다. 김 회장이 언급한 ‘차의 정신’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자, 기다릴 줄 아는 마음 즉 참을성이기도 하다. 어머니로부터 배운 다인의 정신이 오늘의 그를 있게 만든 밑거름이다.
잘 알려져있듯 명원 여사는 우리나라 전통차 복원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인물로, 궁중다례를 전승하고, 생활다례를 보급하는 데 공헌했다. 지금은 그 다맥을 김의정 회장이 잇고 있다. 10대 시절부터 어머니를 따라 궁중다례와 궁중복식을 전수받았다. “어머니가 차문화 복원을 시작했을 때만해도 주변 반응은 차가웠다. 먹고 살기도 힘든 데 차는 무슨 차냐고 비웃는 사람도 많았다.”차 예절이나 다법이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명원 여사는 차와 관련된 자료를 구하기 위해 발품을 많이 팔았다. 전통차와 관련된 자료가 있다면, 바다건너 일본까지 찾아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흥사, 화엄사, 쌍계사 등 차와 관련된 사찰도 순례하고 차 생산과 관련된 유적들도 조사했다. 특히 순종비 윤씨와 인연이 많은 도움이 됐다. 그 소개로 조선의 마지막 상궁인 김명길 상궁을 만나 궁중다법을 익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집까지 초대해 궁중다례를 익혔는데, 매번 지프차로 상궁들을 집까지 모시는 게 김의정 회장의 주요 업무였다. “풀 먹인 모시적삼을 입고 단정한 모습의 김 상궁은 행동 하나하나에 향이 묻어나는 분이었다. 심부름을 하면서 궁중예절과 차를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다.”
김명길 상궁으로부터 전수받은 덕에 궁중다례와 복식은 체계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궁중다법을 일반인들이 따르기 쉽지 않았다. 격식이나 비용적인 측면에서 특히 그랬다. 명원 여사는 궁중다례를 기초로 현대생활다례를 개발하고, 다기도 현대화했다. 차는 종합예술이다. 차문화가 발달하다보면 주변 문화도 함께 진화한다. 차와 다구, 예절과 복식, 차실을 만들기 위한 건축, 조경까지 자연스럽게 발전하게 마련이다. 명원 여사는 특유의 열정과 재력을 바탕으로 이 모든 문화의 발전을 견인했다. 10년의 준비 끝에 한국의 다례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도 개최하고, 중국, 일본 것과는 다른 한국의 차시연회도 마련했다. 김 회장은 “어머니의 다례 복원은 예절을 익히는 것을 넘어 학문적인 연구까지 병행하는 것이었다. 일본다도와 차별해 차에 관한 모든 예절을 만들었던 장본인이 어머니다”라고 강조했다.
어려서부터 명원 여사의 어깨 너머로 배우고 익힌 ‘차의 정신’은 김 회장이 일본에서 문화재 환수운동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됐다. “차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는 다인을 예우해주는 문화가 있다. 일본을 방문했을 때 차선생이라고 자기소개를 했더니 일본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조선왕조도서 1000 여권이 귀환하면서 결과는 성공적이었지만, 과정은 지난했다. 2006년 일본으로 반출된 조선왕실의궤를 찾아오겠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일본 국회의원들은 궁내청 소장 문화재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신적인 존재와 같은 천황 소속의 궁내청 문화재를 돌려줘야 한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다. 주변의 관심도 없었다. 처음 혜문스님이 고군분투했지만 한국과 일본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김 회장의 재정적, 물질적 지원으로 반환운동이 탄력을 받았다.
“혜문스님과 같이 궁내청 의궤를 열람한 적이 있다. 가방이고 메모장이고 휴대폰이고 아무 것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다. 손 소독까지 시킬 정도였다. 우리 문화유산을 보는 것뿐인데 절차나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여름이었는데 손수건 한 장 들고 들어가 50분 안에 8권의 책을 모두 보고 나와야 했다. 시간이 워낙 짧아 주마간산격으로 서둘러 보고 나왔다. 그 때만해도 조선시대 도서가 1000 여권이나 있는 줄 몰랐다.”
뒤늦게 1000 여권의 책이 일본으로 건너간 사실을 알고 함께 돌려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 회장은 80 여명의 국회의원을 한 명 한 명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문화재는 원래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세계를 대표하는 문화강국답게 타국의 문화재를 반환해주고, 식민지 시대 응어리를 조금이라도 풀고 사회적인 관계도 개선해 나가자고 요청했다. 일본사람들에게는 단순한 옛날 책이지만, 우리에게는 역사이자 문화이며, 정신이 아닌가. 우리나라로 돌아와 후손들이 마음껏 지켜보고 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달라고 말했다.”
문화재를 아끼는 마음은 남북한 모두 같았다. 혜문스님 등 환수위원회는 금강산에서 북한 조불련과 만나 문화재 환수에 대한 열망이 담긴 공동의 입장을 발표하면서 일본 관계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한편으로 일본을 감동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식민지에서 반출해간 문화재니 무작정 내놓으라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일본의 국회의원을 만나 먼저 고개를 숙였다. 일본인들을 만나면 그동안 우리 문화재를 잘 보관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빼놓지 않았다. 소중한 우리문화유산을 돌려받기 위한 전략이었다. 젊을 때 배웠던 일본어 덕도 많이 봤다. 의사소통이 되니까 일본인들을 설득하는데 도움이 됐다. 반환운동을 하면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더 생각났다. 어머니가 물려주신 차의 정신이나 좋은 강사를 붙여 고급일본어를 배울 수 있었던 덕에 조선시대 책들도 돌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문화재환수 운동이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노력에 김 회장의 재정지원이 더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가 사재를 털어서 문화재 환수운동에 참여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얘기다.
“힘들 때도 많았지만, 이제는 다 추억이라고 해야겠다. 환수위원들도 잘 몰랐던 고충 중에 하나는 선물준비였다. 일본인들은 누군가를 찾아갈 때 빈손으로 가지 않는다. 국회의원을 찾아갈 때마다 선물을 준비하는 게 내 몫이었는데, 그게 늘 어려웠다.” 비싸면 뇌물처럼 여겨서 받지 않고, 그렇다고 아무 거나 사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고. 예절을 차리는 게 어느 수준인지, 남몰래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일본을 방문할 때도 김 회장은 칠순의 나이에도 항상 이코노미클래스를 고집했다. 그의 이런 선택 때문에 자녀들의 걱정은 컸다. 당시 만해도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회장은 문화재환수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대학생들을 한 명이라도 더 데려가기 위해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문화재 반출의 문제점을 공감하고, 우리 문화재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도 담겨 있다. 비행기는 이코노미 좌석이라도 호텔은 최상급이었다. 이 또한 김 회장의 전략이었다. “예산이 남아서가 아니다. 일본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문화재 환수위원회의 예산이 풍부하고, 한 두번 찾아오고 말 단체가 아니라는 것을 은근히 보여주는 방편이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주변의 관심도 생겨났다. 특히 일본 공산당 카사이 아키라 의원의 도움이 컸다. 카사이 의원은 의궤가 반환될 수 있도록 일본 정부를 압박하고 동료의원들을 설득해 나갔다. “카사이 의원은 전생에 조선사람이었다고 할 정도로 관심을 갖고 열심히 지원해준 은인이다. 든든한 원군이 있어 왕실의궤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조선왕조실록과 의궤, 도서 귀환을 성공적으로 회향했지만, 김 회장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발걸음을 뗄 것이다. 일본을 비롯한 해외 곳곳에는 반출된 한국의 문화재가 수두룩하다.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주는 일을 할 것이다.
◇ 중앙신도회장 역할도 커
조계종 신도회의 수장으로서 올해 역시 다양한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오는 9월말 임기를 마칠 때까지 고삐를 내려놓지 않을 생각이다. 24대 집행부의 성과를 잘 정리하고, 25대 회장단의 원만한 출발을 돕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 특히 중앙신도회는 올해부터 조직사업을 강화해, 현재 조직된 15~16개 교구신도회 임원연수를 직접 주관한다. 그간 각 신도회에 일임하다보니 통일성도 없고 연수 자체가 열리지 않는 곳도 있었다. 올해부터는 공통커리큘럼을 만들어 교구신도회 임원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조직화할 방침이다. 총선, 대선 등 선거를 앞두고 중앙신도회의 역할도 고민 중이다. 정책기획단을 조직해 총무원과 연계해 활동할 생각이다.
이와 함께 전국신도회로 명칭변경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2004년 중앙신도회와 전국신도회가 통합하면서 명칭을 전국신도회로 확정했지만 종헌에 ‘중앙신도회’로 규정돼 있어 아직까지 전국신도회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총무원장 스님이나 포교원장 스님 모두 명칭변경에 긍정적인 말씀을 해줬지만 종헌을 변경해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앙종회의 동의를 거쳐야한다. 종회의원 스님들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 이와 관련해 신도회는 곧 명칭개정 청원서를 종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오는 6월 여수에서 열리는 세계불교도대회(WFB)를 원만하게 회향하는 것도 WFB 부회장이자 한국대회 조직위 대회장을 맡고 있는 김 회장의 몫이다.
종단 안팎의 많은 일들로 어깨가 무거울 법도 하지만, 김 회장의 발걸음은 힘차다. 웃음을 잃지 않는 여유가 느껴진다. “요즘 불교가 점점 되살아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종단을 구성하는 사부대중의 일원으로, 또 신도회를 책임지는 한 사람으로서 더 정진해야겠다는 마음뿐이다. 스님은 스님으로서, 불자는 불자로서 자신의 몫을 해낸다면 조계종은 물론 한국불교의 미래는 밝아질 것이다. 우리 불자들도 한 사람 한 사람 자비심을 갖고 생활 속에서 선행을 실천하고 덕을 쌓길 바란다. 올 한해도 모든 불자들 가정에 부처님 가피와 자비광명이 비추길 발원한다.”
김의정 중앙신도회장은…
194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에서 음악을 전공했으며, 어머니의 유지를 이어 명원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우리나라 차문화 전승 및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1995년 명원문화재단을 설립하고, 명원차문화대상도 시행하는 등 차문화 대중화와 세계화에 기여했다. 2001년에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7호 궁중다례의식 보유자로 지정되는 등 전통문화 보전에도 참여하고 있다.
김 회장은 종단 사상 첫 여성 중앙신도회장을 맡았다. 지난 2005년 처음 선출돼 2009년 재임했다. 임기는 오는 9월말까지다. 이밖에 국민대 이사, 예술의전당 이사, 궁중복식연구원 이사, 한국다도총연합회 총재 등을 지냈으며, 지난 2011년 한국 차문화 진흥과 문화재 환수에 기여하고, 국내외 소외계층을 위한 다양한 문화사업을 벌인 공로를 인정받아 옥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불교신문 2791호/ 2월15일자]
http://lba.or.kr/common/board/listbody.html?a_gb=board&a_cd=14&a_item=0&po_no=21907
'조선왕조의궤 반환 공신은 어머니께 배운 ‘차의 정신’ 일본인 마음 돌리는데 도움'
지난해 해외반출문화재 환수사업과 명원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차문화 대중화를 이끄는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훈장 옥관장을 받은 김의정 중앙신도회장을 성북동 명원문화재단 전수관에서 만났다.
신재호 기자/2012.2.11/불교신문
명원 김미희 여사 슬하서
궁중다례 궁중복식 수학
일본 국회의원 찾아다니며
조선왕조도서 귀환 ‘설득’
올해 교구신도회 연수 주관
여수 세계불교도대회 주력
지난해 12월 일본 궁내청에 보관돼 있던 조선왕실의궤를 비롯한 조선왕조도서 1200권이 100 여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특별한 ‘귀환’의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공동대표인 김의정 조계종 중앙신도회장이다. 그는 지난해 해외반출문화재 환수사업과 명원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차문화 대중화를 이끄는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훈장 옥관장을 받았다. 해외반출문화재 반환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김의정 중앙신도회장을 만나기 위해 지난 1월27일 성북동 명원문화재단 다례전수관을 찾아갔다.
김의정 회장은 고인이 된 어머니 명원 김미희 여사의 대를 이어 문화훈장을 수훈해 더 없이 영광스러워했다. “어머니가 생전에 열정을 갖고 가르쳐준 ‘차의 정신’ 덕분에 문화재도 되찾아올 수 있었고, 옥관훈장도 받게 됐다”며 어머니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다. 김 회장이 언급한 ‘차의 정신’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자, 기다릴 줄 아는 마음 즉 참을성이기도 하다. 어머니로부터 배운 다인의 정신이 오늘의 그를 있게 만든 밑거름이다.
잘 알려져있듯 명원 여사는 우리나라 전통차 복원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인물로, 궁중다례를 전승하고, 생활다례를 보급하는 데 공헌했다. 지금은 그 다맥을 김의정 회장이 잇고 있다. 10대 시절부터 어머니를 따라 궁중다례와 궁중복식을 전수받았다. “어머니가 차문화 복원을 시작했을 때만해도 주변 반응은 차가웠다. 먹고 살기도 힘든 데 차는 무슨 차냐고 비웃는 사람도 많았다.”차 예절이나 다법이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명원 여사는 차와 관련된 자료를 구하기 위해 발품을 많이 팔았다. 전통차와 관련된 자료가 있다면, 바다건너 일본까지 찾아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흥사, 화엄사, 쌍계사 등 차와 관련된 사찰도 순례하고 차 생산과 관련된 유적들도 조사했다. 특히 순종비 윤씨와 인연이 많은 도움이 됐다. 그 소개로 조선의 마지막 상궁인 김명길 상궁을 만나 궁중다법을 익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집까지 초대해 궁중다례를 익혔는데, 매번 지프차로 상궁들을 집까지 모시는 게 김의정 회장의 주요 업무였다. “풀 먹인 모시적삼을 입고 단정한 모습의 김 상궁은 행동 하나하나에 향이 묻어나는 분이었다. 심부름을 하면서 궁중예절과 차를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다.”
김명길 상궁으로부터 전수받은 덕에 궁중다례와 복식은 체계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궁중다법을 일반인들이 따르기 쉽지 않았다. 격식이나 비용적인 측면에서 특히 그랬다. 명원 여사는 궁중다례를 기초로 현대생활다례를 개발하고, 다기도 현대화했다. 차는 종합예술이다. 차문화가 발달하다보면 주변 문화도 함께 진화한다. 차와 다구, 예절과 복식, 차실을 만들기 위한 건축, 조경까지 자연스럽게 발전하게 마련이다. 명원 여사는 특유의 열정과 재력을 바탕으로 이 모든 문화의 발전을 견인했다. 10년의 준비 끝에 한국의 다례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도 개최하고, 중국, 일본 것과는 다른 한국의 차시연회도 마련했다. 김 회장은 “어머니의 다례 복원은 예절을 익히는 것을 넘어 학문적인 연구까지 병행하는 것이었다. 일본다도와 차별해 차에 관한 모든 예절을 만들었던 장본인이 어머니다”라고 강조했다.
어려서부터 명원 여사의 어깨 너머로 배우고 익힌 ‘차의 정신’은 김 회장이 일본에서 문화재 환수운동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됐다. “차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는 다인을 예우해주는 문화가 있다. 일본을 방문했을 때 차선생이라고 자기소개를 했더니 일본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조선왕조도서 1000 여권이 귀환하면서 결과는 성공적이었지만, 과정은 지난했다. 2006년 일본으로 반출된 조선왕실의궤를 찾아오겠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일본 국회의원들은 궁내청 소장 문화재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신적인 존재와 같은 천황 소속의 궁내청 문화재를 돌려줘야 한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다. 주변의 관심도 없었다. 처음 혜문스님이 고군분투했지만 한국과 일본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김 회장의 재정적, 물질적 지원으로 반환운동이 탄력을 받았다.
“혜문스님과 같이 궁내청 의궤를 열람한 적이 있다. 가방이고 메모장이고 휴대폰이고 아무 것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다. 손 소독까지 시킬 정도였다. 우리 문화유산을 보는 것뿐인데 절차나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여름이었는데 손수건 한 장 들고 들어가 50분 안에 8권의 책을 모두 보고 나와야 했다. 시간이 워낙 짧아 주마간산격으로 서둘러 보고 나왔다. 그 때만해도 조선시대 도서가 1000 여권이나 있는 줄 몰랐다.”
뒤늦게 1000 여권의 책이 일본으로 건너간 사실을 알고 함께 돌려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 회장은 80 여명의 국회의원을 한 명 한 명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문화재는 원래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세계를 대표하는 문화강국답게 타국의 문화재를 반환해주고, 식민지 시대 응어리를 조금이라도 풀고 사회적인 관계도 개선해 나가자고 요청했다. 일본사람들에게는 단순한 옛날 책이지만, 우리에게는 역사이자 문화이며, 정신이 아닌가. 우리나라로 돌아와 후손들이 마음껏 지켜보고 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달라고 말했다.”
문화재를 아끼는 마음은 남북한 모두 같았다. 혜문스님 등 환수위원회는 금강산에서 북한 조불련과 만나 문화재 환수에 대한 열망이 담긴 공동의 입장을 발표하면서 일본 관계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한편으로 일본을 감동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식민지에서 반출해간 문화재니 무작정 내놓으라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일본의 국회의원을 만나 먼저 고개를 숙였다. 일본인들을 만나면 그동안 우리 문화재를 잘 보관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빼놓지 않았다. 소중한 우리문화유산을 돌려받기 위한 전략이었다. 젊을 때 배웠던 일본어 덕도 많이 봤다. 의사소통이 되니까 일본인들을 설득하는데 도움이 됐다. 반환운동을 하면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더 생각났다. 어머니가 물려주신 차의 정신이나 좋은 강사를 붙여 고급일본어를 배울 수 있었던 덕에 조선시대 책들도 돌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문화재환수 운동이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노력에 김 회장의 재정지원이 더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가 사재를 털어서 문화재 환수운동에 참여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얘기다.
“힘들 때도 많았지만, 이제는 다 추억이라고 해야겠다. 환수위원들도 잘 몰랐던 고충 중에 하나는 선물준비였다. 일본인들은 누군가를 찾아갈 때 빈손으로 가지 않는다. 국회의원을 찾아갈 때마다 선물을 준비하는 게 내 몫이었는데, 그게 늘 어려웠다.” 비싸면 뇌물처럼 여겨서 받지 않고, 그렇다고 아무 거나 사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고. 예절을 차리는 게 어느 수준인지, 남몰래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일본을 방문할 때도 김 회장은 칠순의 나이에도 항상 이코노미클래스를 고집했다. 그의 이런 선택 때문에 자녀들의 걱정은 컸다. 당시 만해도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회장은 문화재환수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대학생들을 한 명이라도 더 데려가기 위해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문화재 반출의 문제점을 공감하고, 우리 문화재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도 담겨 있다. 비행기는 이코노미 좌석이라도 호텔은 최상급이었다. 이 또한 김 회장의 전략이었다. “예산이 남아서가 아니다. 일본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문화재 환수위원회의 예산이 풍부하고, 한 두번 찾아오고 말 단체가 아니라는 것을 은근히 보여주는 방편이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주변의 관심도 생겨났다. 특히 일본 공산당 카사이 아키라 의원의 도움이 컸다. 카사이 의원은 의궤가 반환될 수 있도록 일본 정부를 압박하고 동료의원들을 설득해 나갔다. “카사이 의원은 전생에 조선사람이었다고 할 정도로 관심을 갖고 열심히 지원해준 은인이다. 든든한 원군이 있어 왕실의궤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조선왕조실록과 의궤, 도서 귀환을 성공적으로 회향했지만, 김 회장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발걸음을 뗄 것이다. 일본을 비롯한 해외 곳곳에는 반출된 한국의 문화재가 수두룩하다.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주는 일을 할 것이다.
◇ 중앙신도회장 역할도 커
조계종 신도회의 수장으로서 올해 역시 다양한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오는 9월말 임기를 마칠 때까지 고삐를 내려놓지 않을 생각이다. 24대 집행부의 성과를 잘 정리하고, 25대 회장단의 원만한 출발을 돕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 특히 중앙신도회는 올해부터 조직사업을 강화해, 현재 조직된 15~16개 교구신도회 임원연수를 직접 주관한다. 그간 각 신도회에 일임하다보니 통일성도 없고 연수 자체가 열리지 않는 곳도 있었다. 올해부터는 공통커리큘럼을 만들어 교구신도회 임원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조직화할 방침이다. 총선, 대선 등 선거를 앞두고 중앙신도회의 역할도 고민 중이다. 정책기획단을 조직해 총무원과 연계해 활동할 생각이다.
이와 함께 전국신도회로 명칭변경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2004년 중앙신도회와 전국신도회가 통합하면서 명칭을 전국신도회로 확정했지만 종헌에 ‘중앙신도회’로 규정돼 있어 아직까지 전국신도회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총무원장 스님이나 포교원장 스님 모두 명칭변경에 긍정적인 말씀을 해줬지만 종헌을 변경해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앙종회의 동의를 거쳐야한다. 종회의원 스님들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 이와 관련해 신도회는 곧 명칭개정 청원서를 종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오는 6월 여수에서 열리는 세계불교도대회(WFB)를 원만하게 회향하는 것도 WFB 부회장이자 한국대회 조직위 대회장을 맡고 있는 김 회장의 몫이다.
종단 안팎의 많은 일들로 어깨가 무거울 법도 하지만, 김 회장의 발걸음은 힘차다. 웃음을 잃지 않는 여유가 느껴진다. “요즘 불교가 점점 되살아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종단을 구성하는 사부대중의 일원으로, 또 신도회를 책임지는 한 사람으로서 더 정진해야겠다는 마음뿐이다. 스님은 스님으로서, 불자는 불자로서 자신의 몫을 해낸다면 조계종은 물론 한국불교의 미래는 밝아질 것이다. 우리 불자들도 한 사람 한 사람 자비심을 갖고 생활 속에서 선행을 실천하고 덕을 쌓길 바란다. 올 한해도 모든 불자들 가정에 부처님 가피와 자비광명이 비추길 발원한다.”
김의정 중앙신도회장은…
194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에서 음악을 전공했으며, 어머니의 유지를 이어 명원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우리나라 차문화 전승 및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1995년 명원문화재단을 설립하고, 명원차문화대상도 시행하는 등 차문화 대중화와 세계화에 기여했다. 2001년에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7호 궁중다례의식 보유자로 지정되는 등 전통문화 보전에도 참여하고 있다.
김 회장은 종단 사상 첫 여성 중앙신도회장을 맡았다. 지난 2005년 처음 선출돼 2009년 재임했다. 임기는 오는 9월말까지다. 이밖에 국민대 이사, 예술의전당 이사, 궁중복식연구원 이사, 한국다도총연합회 총재 등을 지냈으며, 지난 2011년 한국 차문화 진흥과 문화재 환수에 기여하고, 국내외 소외계층을 위한 다양한 문화사업을 벌인 공로를 인정받아 옥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불교신문 2791호/ 2월15일자]
http://lba.or.kr/common/board/listbody.html?a_gb=board&a_cd=14&a_item=0&po_no=21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