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

관리자
2020-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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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는 고려 중기의 명문장가(名文章家)로서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 지헌(止軒) ? 삼혹호(三酷好) 선생 등이었다.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발탁되었으나, 국가행사인 팔관회(八關會)의 행사를 잘못 주재하였다는 이유로 유배당하였다가 복권되었다.
그는 걸출한 시호(詩豪)이었으며, 호탕 ? 활달한 시풍으로 당대를 풍미하였다. 특히 그가 벼슬에 오를 때마다 그 감상을 읊은 즉흥시들은 유명하다. 초기에는 도연명(陶淵明)의 영향을 받았으니 점차 개성을 살려 독자적인 시격(詩格)을 이룩하였다.
시(詩) ? 술(酒) ? 거문고(琴)를 즐긴 그의 성품은 그로 하여금 삼혹호 선생이란 호를 받게 하였으며, 만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여생을 보냈다.
그의 대표적인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많은 차에 관한 주옥같은 다시(茶詩)가 실려 있다. 그가 당시 교우관계를 맺었던 스님이나 선비들과 주고 받은 시를 보면, 그 하나하나가 당시 고려인에게 있어서 다도(茶道) 생활이 얼마나 풍미하고 있었는지를 잘 나타내 주며, 또한 참다운 다인(茶人)의 생활 모습을 밝혀주고 있다. 즉, 차를 사랑하고 차를 즐기는 다인의 모습이란 세속에 살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는 이른바 처렴상정(處染常淨)의 고고한 기품이 있는 생활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세속에 영합하거나 권세에 아부하는 소인배(小人輩)의 생활을 영위한다면 이는 참다운 다인이라 할 수 없다. 산중의 수도승과 같은 생활만이 다인의 생활인 것이 아니라, 세속에 살면서도 시류에 휩싸이지 않는 선비정신이 곧 다인의 정신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규보의 차와 술에 대한 애착은 다음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술의 덕(德)도 다함이 없는가 하면 차의 덕(德)도 극함이 없다. 내 능히 술 마시고 차 마시는데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이기고 질까보냐.”
라고 하여 차와 술을 똑같이 아끼는 듯이 보이나
“차 한 잔 마시고 한 마디씩 나누어 심오한 경지에 들어가면 그 즐거움이란 참으로 맑고 산뜻한 것이어서 굳이 술에 취할 필요가 없으리라.”
라고 말함으로써 술보다 차를 그만큼 더 아끼고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때,  운봉(雲峰)에 사는 노규선사(老珪禪師)가 조아다(早芽茶)라는 차를 보내오자 이를 스스로 유차(孺茶)라고 이름하고, 시를 지었다. 특히 이 시는  이규보의 다인으로서의 높은 경지를 한번에 알 수 있을 만큼 다시(茶詩)로서 백미(白眉)로 전해지고 있다.


인간이 온갖 맛을  일찍이 맛봄이 귀중하니
하늘은 사람을 위하여 절후를 바꾸네
봄에 자라고 가을에 성숙함이 당연한 이치이니
이에 어긋나면 기이한 일이건만
근래의 습속이 이 기이함을 즐기니
하늘도 인정의 즐겨함을 따르는구나
시냇가의 차잎을 이른 봄에 싹트게 하니
황금 같은 노란 움 눈속에 자라났네
남쪽 사람은 맹수도 두렵지 않아
험난함을 무릅쓰고 칡넝쿨 휘어잡고
간신히 채취하여 불에 말려 단차 만드니
남보다 앞서 임금님께 드리려 하네
선사는 어디에서 이처럼 귀한 것을 얻었는가
손에 닿자 향기가 코에 가득
활활 타오르는 화롯불에 손수 차를 달여
꽃무늬 자기에 따라 그윽한 색을 자랑하누나
입에 닿으니 달콤하고 부드러워
마치 어린아이의 젖 내음과 같구나
부귀한 가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데
우리 선사 어찌 이를 얻었는가 알 수 없네
남쪽의 아이들 선사의 처소를 알지 못하니
찾아가 맛보고 싶은들 어이 이룰 수 있는가
아마도 깊은 구중궁궐에서
높은 선사 예우하여 예물로 보냈음이라
차마 마시지 못하고 아끼고 간직하였다가
임금님의 그 봉물을 신하를 시켜 보내왔다네
세상살이를 모르는 쓸모없는 이 나그네가
더구나 좋은 혜산천의 물까지 감상하였네
평생의 불우함을 만년에 탄식했는데
일품을 감상하기는 오직 이뿐일세
귀중한 유차를 마시고 어이 사례가 없겠는가
공에게 맛있는 봄 술을 빚어놓고 권하오니
차들고 술 마시며 여생을 보내면서
오며가며 풍류놀이를 시작하여 보세
어찌 굽혀 절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