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선사

관리자
2020-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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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선사(草衣禪師, 1786 - 1866)

조선후기의 승려

1. 서 문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 943번지에서 부친 장주팔(張籌八)과 모친 무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모친이 큰별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서 그를 잉태해 낳았다고 한다. 어릴적 아명은 우순(宇恂), 자가 의순(意恂)이고,성은 장씨이고 본관은 흥성이다. 법호는 초의(艸衣)이며, 당호는 일지(一枝)인 조선 후기의 대선사로서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하신 분이다. 그래서 스님을 다성(茶聖)이라 부른다. 헌종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 초의대선사라는 시호를 받았다.

1786년(정조10)에 태어난 스님은 5세 때에 강변에서 놀다가 급류에 떨어져 죽을 고비에 다다랐을 때 부근을 지나는 승려가 건져주어 살게 되었다. 그 승려가 출가할 것을 권하여 15세에 남평 운흥사(雲興寺)에서 벽봉민성 스님을 은사로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초의는 19세에 남평에서 행자생활을 하다 절을 나와 해남 대흥사로 가던 도중 영암 월출산에 올라 해가 지면서 바다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대흥사에서 완호 대사를 계사로 구족계를 받고 초의라는 당호를 얻는다, 여기서 불교의 삼장을 수학하고 대교과정을 마치게 된다. 이후 운수행각으로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정진해 經.律.論 모두에 통달하였다.

22세가 되자 잠시 화순 쌍봉사로 옮겨 금담 선사로부터 선을 배우며 토굴에서 정진 수행하다가 다시 대흥사로 돌아와 연담 선사께 나아간다. 이해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정약용을 대면하게 된다. 초의는 자신보다 25세 연상인 다산에게서 유학과 시문을 배우면서 함께 월출산 백운동에 들어가 월출산의 비경을 화폭에 담아"백운도"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2. 한양 각지에서 명사들과 교류

또 30세에 처음으로 상경하여 완당 김정희를 만난다. 상경해 성밖 청량사에 머물자 장안의 명사들이 몰려들어 詩會와 茶會가 성황를 이루었다. 당시 초의가 교유한 인사들은 당대의 일급 지식인 그룹에 속하는 명사들로 정약용의 자제들,추사 김정희와 그 형제들,연천 홍석주의 형제, 신관호,권돈인 등과 교류하여 정신세계의 폭과 깊이를 더해갔다.

특히 화가로서 초의는 한국 회화사에서 큰 일을 한다. 초의는 낭암스님으로부터 탱화라고 불리는 불화를 전수 받으면서부터 그림을 시작하여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갔다. 현재 대흥사에 있는 탱화와 전국 곳곳에 있는 사찰의 많은 불화가 초의의 작품이거나 그의 지도를 받은 제자들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수준을 파악하고도 남음이 있다.

50세가 된 초의가 일지암에 있을 때 진도에 살고 있는 소치 허유가 선사를 찾아와 그림을 배우니 초의는 몸소 가르치면서 추사에게 보내 사사케하고 당시 많은
서화 묵객들과 교유시켜 화가로서  대성을 하게 한다. 마침내 小痴는 헌종 임금께 나아가 그림을 그려 총애를 한몸에 받는다. 남종화의 종주 소치는 이후 직계 자손인 미산,남농,임전  등으로 남종화를 뿌리내리니 초의는 실질적인 남종화의 시원인 셈이다.

3.맑은 차 한잔의 맛과 멋

[초의대선사 상]

一傾玉花風生腋
身輕已涉上淸境
明月爲燭兼爲友
白雲鋪席因作屛

옥화 한잔 기울이니 겨드랑에 바람 일어
몸 가벼워 하마 벌써 맑은 곳에 올랐네.
밝은 달은 촛불 되어 또 나의 벗이 되고
흰 구름은 자리 펴고 병풍을 치는구나.

- 초의선사, 《동다송》제16송 의역


石泉煎茶(돌샘물로 차 끓이다)

天光如水水如烟 此地來遊已半年

良夜幾同明月臥 淸江今對白鷗眠

嫌猜元不留心內 毁譽何會到耳邊

袖裏尙餘驚雷笑 倚雲更試杜陵泉

하늘빛은 물과 같고 물은 이내 같도다

이곳에 와서 논 지 이미 반 년

명월과 함께 누워 지내던 좋은 밤이 몇 번이던고

남을 시기하는 것은 본래 마음에 없으니

좋다 궂다하는 말이 어찌 귀에 들어오리

소매 속에는 아직도 경뢰소차가 남아 있으니

구름에 의지하여 두릉천으로 또 차를 끓이네


초의선사(艸衣禪師) 행장(行狀)

녹차이야기를 끄집어 낼 때 대표적인 사람은 초의선사(艸衣禪師)이시다. 왜냐하면 초의선사께선 다도의 이론과 실제를 생활화하면서 우리 전통차 문화를 꽃피운, 우리전통차의 발전뒤에 우뚝 서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녹차를 이해하기 위해선 초의선사의 행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음의 초의선사 행장은 경남 하동 화개면 쌍계사에 계시는 통광스님이 역주하신 「초의다선집」에 있는 내용 전문(全文)이다.


4. 일생 마침

"과일이나 열매만을 먹고 풀옷차림에도 마음은 달처럼 밝다. 한평생 집착하는 마음이 없고 한이 없다. 사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푸른 산 초록빛 산, 이것이 내집이지요." 찻물 끓이듯 정성스럽게 삶을 꾸리고 은은한 다향처럼 세속을 넓게 들여다 본 큰 스님 초의.

호남사상을 따지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몇백년동안 계속된 억불정책으로 쇠잔해가던 조선 말기에 태어나 한시대를 풍미한선사의 선사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당시 불교계가 전(專)선(禪)일변도로 흐르고 있느 사조에 반해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진리를 구현하려고 노력하엿다는 점이다. 즉 선사는 언제나 제법(諸法)불이(不二)를 강조하여 그에게는 차(茶)와 선(禪)이 둘이 아니고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와 선이 둘이 아니었다.

특히 다선(茶禪)일미(一味)사상에 심취하여 차를 통해 법희선열식의 다선(茶禪)삼매(三昧) 에 들곤 하였다. 또한 스님은 범패와 원예,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장 담그는법, 화초기르는 법, 단방향 등에까지 능하였다. 실학의 대가 정약용과 실사구시를 주창한 김정희와의 교류에서 영향을 받은 바 있어 다방면에 능통하였던 것이다.

다성(茶聖) 초의와 서성(書聖) 추사와의 교유는 각별하여 평생을 통해 지속되었는데 두 사람은 동갑나기로서 서로가 서로를 드높여 주는 남다른 사이였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초의는 당시 험난한 뱃길을 건너 세 차례나 제자 소치(小痴) 허유(許維)를 통해 추사에게 손수 법제한 차를 보내고 추사는 초의에게 글을 써 보내기도 하였다.

71세 되던 해 10월에는 42년간 금란지교를 맺어온 김정희가 과천 청계산 아래에서 유명을 달리하자, 그의 영전에 완당김공제문을 지어 올리고 일지암에 돌아와 쓸쓸히 만년을 보냈다.

선사의 저서로는 일생 동안 참선하는 여가에 사대부와 교유하면서 지은 시를 모은 《일지암시고》와 일생동안 지은 소(疎) 기(記) 서(序) 발(跋) 제문(祭文) 영찬(影讚)등을 실은 《일지암문집》, 선의 요지를 밝흰 《선문염송》중에서 골자만을 가려 주석을 달아 놓은 《초의선과》, 조선후기 선 논쟁으로 백파긍선의 선론에 반대의 입장을 밝힌 《선문사변만어》, 한국의 다(茶)경(經)으로 불리는 《동(東)다(茶)송(頌)》, 차의 지침서인 《다신(茶神)전(傳)》, <이선래의(二禪 來儀)> 1권, <초의시고(草衣詩藁)> 2권, <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考)> 1권, <동다송> 1권, <다신전(茶神傳)> 1권 등이 있다.

일찍이 대흥사를 크게 일으킨 중흥조로서 13대종사에 이르렀고, 다도의 이론과 실제를 생활화함으로써 우리나라 전통차 문화를 꽃피운 선사는 일생을 통하여 선과 교의 어느 한 쪽에 치우침이 없이 수도하고 중생을 제도 했는데, 세수 81세(고종 3년 1866년) 법랍 65세를 일기로 대흥사 쾌년각에서 서쪽을 향해 가부좌를 하고 입적하였다.

선사에게 사미계를 받은 스님이 40여 명, 보살계를 받은 스님이 70여 명, 선교 및 잡공을 배운 사람이 수백명에 달하였다. 대흥사 남쪽 기슭에 스님의 부도를 세웠는데 송파 이희풍이 탑명을 지었으며 탑의 오른쪽에는 비석을 세워 양석 신관호가 비문을 지었다.